Wednesday's child, Mercredi

봉건제의 거울 발제 본문

=多餘的話= 2001~2007/=多餘的話= 第二期

봉건제의 거울 발제

mercredi 2005. 3. 8. 22:43
제 3장 봉건제의 거울

서양사학과 정선영

0)전통적인 역사서술 - 중세는 ‘암흑의 시기’. 로마 제국이 몰락은 고대 문화의 ‘대단절’을 의미하며 1000여 년의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의 문명이 회복한다는 도식이 성립함. 중세를 구성하는 요소는 봉건제, 기독교,

1)중세는 과연 고대 문화와의 단절인가?
*당시 사람들에겐 로마제국의 몰락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즉 로마가 과거시제에 존재하는 이미 끝나버린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변화되거나 변질되어 가는 모습이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서유럽 세계가 다시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야만의 땅으로 되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자체적인 교역의 발달, 오리엔트로 통하는 새로운 교역로의 탐색, 야만인 왕국의 왕들도, 비록 완벽한 복원을 이루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로마제국에서 보존할 수 있는 부분은 보전하려 노력했음) “유럽은 카롤링거 제국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제국에 대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고대문화의 보전 : 정치적으로는 거의 실패. 그러나 문자문화영역에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되었음. 카롤링거 르네상스. 그렇지만 라틴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의 사제들. 카롤링거 르네상스란,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과거의 회복에 지나지 않음. (진정한 의미의 보존은 비잔틴에서)

2)중세는 과연 고립되고 종교에 열광하던 시기였을까?
*교회와 정치의 관계 - 개종의 정치적 의미 : 타 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곳 그 민족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곧 개종은 정치세력의 통합을 의미했다.
*중세의 문화는 순수하게 게르만적 요소와 로마의 전통, 기족교적 바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전기 이전 문화들의 유산들의 재출현, 바이킹과 켈트인 사이에 일어난 교역, 아시아(주로 이슬람권)를 통해 들어온 과학과 기술들이 유럽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3)봉건제의 출현
*1000년경의 유럽 - 인구증가와 농업 발달, 그리고 그에 따라 활발하게 된 교역. 도시의 발달. 그리고 문화적 혁신. 이러한 발전의 결과들이 눈에 보이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 봉건제의 등장이라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남. 위계(order) 혹은 신분-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노동하는 자 -이 등장하여 사회적 구도가 확립되었다.
*봉건사회의 등장 - 기사계급의 지배, 토지의 통합과 그에 따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종속되는 구조. 이는 모두 교회의 협조에 의해 가능했던 일들이다. 결국 세속 유력자들(기사계급)과 성직자 유력자들의 지배가 확립됨.

4)저자가 보는 봉건제 출현의 이유
농업의 발달에 기반한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교역과 수공업의 성장 -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중심에는 ‘노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노동은 따로 떨어져서 생산을 위해 단순하게 반복되었던 것이 아니다. 서로 관련을 맺고 의존하며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경제력의 성장은 곧 권력의 성장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중세의 성장은 사실 노동하는 자들 덕분이었던 것이었다. 저자는 봉건제를 이렇게 점점 해방되어 번영해가는 농민들을 통제하고 다시 예속하여 보다 큰 생산과 보다 큰 착취를 얻기 위하여 영주들과 교회가 이용한 전략이었다고 보고 있다. 곧 봉건제의 거울을 걷어내고 나면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대단절’과 르네상스라는 ‘회복’ 사이의 깊은 간극 사이의 연속이 보일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야기 해보고 싶은 점들 : -그렇다면 중세는 누구에 의해 왜 ‘암흑기’로 평가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