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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2/04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 오규원
- 2005/01/26 [펌]고독의 조건
- 2004/08/09 내가 공부하는 방법 - 강유원
- 2003/09/07 多餘的話
- 2002/02/18 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by zizine
글
주워온 글들 2008/05/04 03:01from mother goose
Monday's child is fair of face
Tuesdays's child is full of grace
Wednesday's child is full of woe
Thursday's child has far to go
Friday's child is loving and giving
Saturday's child works hard for his living
And thd child is born on the sabbath day
Is bonny and blithe, and good and g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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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5/03/09 19:56허영심
허영심을 잃으면 본능적인 기쁨도 사라진다. 허영심은 자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거울을 쳐다보는 젊은 여인의 눈길. "나는 너무 예뻐.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볼 거야." 이런 생각은 행복을 준다. 혹은 자신을 칭찬하는 신문기사를 읽고 있는 배우의 눈길. "나는 사랑과 숭배를 받고 있어. X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청중을 바라보는 강연자의 눈길. "모두들 나를 모시려고 야단들이야." 혹은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 "아무리 봐도 나는 정말 잘생겼어. 여자들이 홀딱 넘어갈 거야." 혹은 운동선수. "Y보다는 내가 월등 우수한 선수지." 혹은……. 혹은…….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며 허영심을 느끼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자신에게 홀딱 반하는 데, 더 정확히 말해, 자기 자신의 시공간적 현상을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의 계명.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외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은 꾸준한 자아, 불변의 인격이다. 스쳐지나가는 현상이나 자기 도취가 아니다. 사랑은 더 큰 것을 향한 헌신이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월이 가면 사라질 자신의 장점에 홀딱 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수천 수만의 존재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삼라만상이 그러하듯!) 신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어리석은 허영심을 제거해준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나이가 들어가면서) 허영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갑자기 멸시당한 느낌을 받으면 어떤가? 어리석은 내가 불끈 일어선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어쨌든……. 내 자신의 체험. 작가라는 허영심이(원래 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사라지면서 서서히 내 삶은 빈약해지고 퇴색 되어갔다. 거울보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나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저기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칭찬과 사랑, 비난과 험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차츰차츰 내게서 미사여구가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자조와 냉담. 삶의 풍경은 자꾸만 삭막해지고 굳어졌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말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인간이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위험은 있다. 허영심을 버렸다는 허영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이다. 무아(無我)의 황무지에서 살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허영심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을 불러올 교만이다.
신이시여, 저에게 잠시동안 약간의 허영심과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하소서! 벌거벗은 저를 깨달음의 황무지에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출처 : http://imige.com.ne.kr/destiny/13.htm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의 계명.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외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은 꾸준한 자아, 불변의 인격이다. 스쳐지나가는 현상이나 자기 도취가 아니다. 사랑은 더 큰 것을 향한 헌신이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월이 가면 사라질 자신의 장점에 홀딱 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수천 수만의 존재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삼라만상이 그러하듯!) 신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어리석은 허영심을 제거해준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나이가 들어가면서) 허영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갑자기 멸시당한 느낌을 받으면 어떤가? 어리석은 내가 불끈 일어선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어쨌든……. 내 자신의 체험. 작가라는 허영심이(원래 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사라지면서 서서히 내 삶은 빈약해지고 퇴색 되어갔다. 거울보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나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저기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칭찬과 사랑, 비난과 험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차츰차츰 내게서 미사여구가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자조와 냉담. 삶의 풍경은 자꾸만 삭막해지고 굳어졌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말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인간이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위험은 있다. 허영심을 버렸다는 허영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이다. 무아(無我)의 황무지에서 살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허영심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을 불러올 교만이다.
신이시여, 저에게 잠시동안 약간의 허영심과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하소서! 벌거벗은 저를 깨달음의 황무지에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출처 : http://imige.com.ne.kr/destiny/1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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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5/02/21 18:0350일의 잠 - 列子와 함께 (박제천)
50일의 잠
- 列子와 함께 (박제천)
이 세상의 어느 끝에 있다는
한번 잠자면 50일 만에 깨어나는
그 나라에서
너를 만나기로 하자
뜸부기가 울고, 개망초꽃이 피는
둔덕에서
너와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밤도 없고 낮도 없는
사랑을 하자
해와 달과 별이
초롱초롱한 눈매로 내려다보고
바람이며 풀벌레며 나뭇잎들은
귀를 기울여
우리 가슴속에 뛰노는 말들을 엿듣는
그 나라에서
우리는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기로 하자
깨어서의 일은 모두 헛것이며
꿈속의 일이 오로지 삶의 몫인
그 나라에서
우리는 50일 동안 잠을 자기로 하자
꿈속에서는 사랑을 하고
한번 깨어나서는 헤어지는
삶을
살기로 하자.
- 列子와 함께 (박제천)
이 세상의 어느 끝에 있다는
한번 잠자면 50일 만에 깨어나는
그 나라에서
너를 만나기로 하자
뜸부기가 울고, 개망초꽃이 피는
둔덕에서
너와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밤도 없고 낮도 없는
사랑을 하자
해와 달과 별이
초롱초롱한 눈매로 내려다보고
바람이며 풀벌레며 나뭇잎들은
귀를 기울여
우리 가슴속에 뛰노는 말들을 엿듣는
그 나라에서
우리는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기로 하자
깨어서의 일은 모두 헛것이며
꿈속의 일이 오로지 삶의 몫인
그 나라에서
우리는 50일 동안 잠을 자기로 하자
꿈속에서는 사랑을 하고
한번 깨어나서는 헤어지는
삶을
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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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5/02/04 17:58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 오규원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
몇 가락을 뽑았고,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
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정오에 출근했고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
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
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
그 옆에 선 아이들 조차
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
버스가 탈선되기를 탈선의 장치의
거리가 준비되기를,
허락받은 사람들은 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해
세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 , 그리고
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
냄새가 나지않는 사랑이란
맹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
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
세방을 얻어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나에게 질문하며,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술과 함께 오기도 좀, 개뿔도 좀, 흰소리도 좀,십원짜리도 좀 마셨고
그러나 오늘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
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
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
이웃집 지붕위로
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일어나 있었고,
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
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
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
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
한번듣고 ,뒤집어서
반야경을 한 번 듣고.
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 처럼 출근했고
출근 하자마자 커피를 한잔 마셨고
전화 두통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
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서정시가 이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 하며,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
살것이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
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
주소도 알려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
계속 편지를 쓸것이다.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것이고
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
궁리할 것이고
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것이고
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것을
사랑하며 만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
전화가 불통이면
편지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
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
몇 가락을 뽑았고,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
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정오에 출근했고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
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
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
그 옆에 선 아이들 조차
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
버스가 탈선되기를 탈선의 장치의
거리가 준비되기를,
허락받은 사람들은 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해
세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 , 그리고
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
냄새가 나지않는 사랑이란
맹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
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
세방을 얻어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나에게 질문하며,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술과 함께 오기도 좀, 개뿔도 좀, 흰소리도 좀,십원짜리도 좀 마셨고
그러나 오늘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
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
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
이웃집 지붕위로
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일어나 있었고,
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
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
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
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
한번듣고 ,뒤집어서
반야경을 한 번 듣고.
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 처럼 출근했고
출근 하자마자 커피를 한잔 마셨고
전화 두통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
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서정시가 이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 하며,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
살것이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
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
주소도 알려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
계속 편지를 쓸것이다.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것이고
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
궁리할 것이고
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것이고
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것을
사랑하며 만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
전화가 불통이면
편지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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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5/01/26 21:23[펌]고독의 조건
[고독의 조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얻으려는 뿌리깊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낭만적 동반자(Romantic partner) : 사랑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애인, 연인, 이성친구
사교적 동반자(Social partner) :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친구, 부담없이 만나서 생각과 감정을 나눌있는 고향친구, 동문친구, 동아리친구,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친구들
작업적 동반자(Working partner) : 업이나 학업에서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일을 같이 하는 직장동료, 학우, 가치나 이념의 실현을 위해 함께 활동하는 동지
가족적 동반자(Familial partner) : 혈연관계인 부모, 형제자매 등의 가족, 가정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동반자
이러한 동반자들은 삶을 지탱하는 인간관계의 네 가지 주된 요소들입니다. 네 가지 종류의 동반자 중에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이 결여되거나 그 관계 속에서 좌절과 불만족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출처 : 대학생활문화원 홈페이지
나에겐 1번과 3번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간헐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무 기죽지는 말자. 씩씩학게 살면서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지.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얻으려는 뿌리깊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낭만적 동반자(Romantic partner) : 사랑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애인, 연인, 이성친구
사교적 동반자(Social partner) :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친구, 부담없이 만나서 생각과 감정을 나눌있는 고향친구, 동문친구, 동아리친구,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친구들
작업적 동반자(Working partner) : 업이나 학업에서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일을 같이 하는 직장동료, 학우, 가치나 이념의 실현을 위해 함께 활동하는 동지
가족적 동반자(Familial partner) : 혈연관계인 부모, 형제자매 등의 가족, 가정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동반자
이러한 동반자들은 삶을 지탱하는 인간관계의 네 가지 주된 요소들입니다. 네 가지 종류의 동반자 중에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이 결여되거나 그 관계 속에서 좌절과 불만족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출처 : 대학생활문화원 홈페이지
나에겐 1번과 3번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간헐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무 기죽지는 말자. 씩씩학게 살면서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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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4/08/09 17:59내가 공부하는 방법 - 강유원
1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2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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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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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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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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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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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출처 : '천개의 고원'을 읽자
작성자 : 박찬섭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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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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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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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5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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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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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출처 : '천개의 고원'을 읽자
작성자 : 박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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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3/09/07 19:25多餘的話
동사과/용화반의 잡기장 이름은 다여적화이지요. 새내기적엔 그냥 동양사학과이니 한문으로 알아서 지었으려니 했고, 2학년이 되면서 구추백과, 그의 저서, 그리고 다여적화라는 말의 뜻(불필요한말, 잡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다여적화, 혹은 줄여서 다여라는 말이 점점 저에게 각별해지고 또 그 말에 뭔지모를 정이 드는 것 같았지요.
오늘 인문대 홈페이 검색을 하다 우연히 찾은 이 글에서 다여적화가 동양사학과에게, 혹은 용화반에게도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하나 더 찾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글은 민두기선생님께서 소천하셨을 때 지금은 미국에 계신 93학번 영헌오빠께서 쓰신 글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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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의 뒤늦은 깨달음
曺永憲 (박사과정, 93학번)
"이제 오르던 산을 내려갈 때가 됐습니다. 저는 1997년 12월 8일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40여 년의 학구생활에서 벗어나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65세 정년제의 덕입니다."
정년퇴임을 앞두신 민 선생님께서 知人들에게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제히 보내셨던 마지막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당시 과 T.A.로서 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이 편지를 복사하던 저는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문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민 선생님이 평소에 정말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바라셨단 말인가? 한 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으며 타인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하셨다던 그 선생님이? 당시의 저로서는 솔직히 세상의 그 어떤 반어적인 겸양의 표현도 이보다는 더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민 선생님은 소천하셨고, 또 벌써 그로부터 10여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은 그때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그 '한가로운 자적의 삶'이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문득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마지막 수업의 강의노트를 뒤척인 이후부터 말미암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받은 마지막 수업은 1997년 1학기 대학원 수업으로, 강의주제는 공산주의자 瞿秋白의 삶, 특히 죽음 직전에 남겼다는 <불필요한 말(多餘的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민 선생님께서 평소의 관심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구추백을 연구주제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수강하지 않는 여러 선배들까지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있고, 무엇보다 <多餘的話>의 흥미로운 내용은 저를 비롯한 수강생 모두를 강의 주제로 몰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領袖로 추앙받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 초반을 살아갔던 구추백. 하지만 그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사형되기 1달 전에 남긴 최후진술서 <多餘的話>는, 마치 그것이 국민당의 조작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남길 정도로 '충격적'인 자기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 매우 평범한 일개 文人으로서 중국 공산당의 영수로 10년 동안 명성을 누려온 것이야말로 "역사의 오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는 자조적인 어투와 함께.
자연 구추백의 <多餘的話>를 놓고 수업시간에도 다양한 해석이 오고갔지만, 정작 수업이 한참 지난 후 강의노트를 뒤척이며 잠시 깊은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필기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구추백의 폐결핵이라는 상황도 고려해야... 죽음 직전에 약한 모습 있기에... 아마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후회가 있었을 듯... 더구나 문학적 감성을 지닌 'tender-hearted'인 구추백이니..." 얼마나 정확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적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선생님은 구추백이 겪어왔던 폐결핵의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뇌를 주목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하셨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추백의 고통과 고뇌가 민 선생님의 병마와 그로 인해 겪으셨을 고통/고뇌와 연상되기 시작하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多餘的話>의 내용뿐 아니라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여망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저의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풀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多餘的話>를 펴 보니, "이런 피로감은 어떤 때에는 너무나 심해져 형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을 정도까지 되었소. 당시 나는 느꼈소. 우주가 사멸하든 말든 革命을 하든 反革命을 하든 간에 좀 쉬었으며, 쉬었으며, 쉬었으면!! 그렇소, 이제 '영원한 휴식'의 기회가 왔소"라는 구추백의 고백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이미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감지라도 하셨는지, 혹은 이러한 정황의 유사성으로 특별히 <多餘的話>를 마지막 연도의 강의교재로 선정하셨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선생님께서 <多餘的話>로 마지막 수업을 받은 제자에게 그 주제는 결코 예사롭지 않게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한때나마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아마 그때에도 선생님은 <多餘的話>의 초두에 인용된 『詩經』을 통해 무수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텐데...
"내 마음 아는 자, 근심 있구려! 하고, 내 마음 모르는 자, 무엇을 찾나? 하네.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荷求)"
오늘 인문대 홈페이 검색을 하다 우연히 찾은 이 글에서 다여적화가 동양사학과에게, 혹은 용화반에게도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하나 더 찾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글은 민두기선생님께서 소천하셨을 때 지금은 미국에 계신 93학번 영헌오빠께서 쓰신 글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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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의 뒤늦은 깨달음
曺永憲 (박사과정, 93학번)
"이제 오르던 산을 내려갈 때가 됐습니다. 저는 1997년 12월 8일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40여 년의 학구생활에서 벗어나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65세 정년제의 덕입니다."
정년퇴임을 앞두신 민 선생님께서 知人들에게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제히 보내셨던 마지막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당시 과 T.A.로서 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이 편지를 복사하던 저는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문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민 선생님이 평소에 정말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바라셨단 말인가? 한 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으며 타인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하셨다던 그 선생님이? 당시의 저로서는 솔직히 세상의 그 어떤 반어적인 겸양의 표현도 이보다는 더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민 선생님은 소천하셨고, 또 벌써 그로부터 10여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은 그때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그 '한가로운 자적의 삶'이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문득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마지막 수업의 강의노트를 뒤척인 이후부터 말미암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받은 마지막 수업은 1997년 1학기 대학원 수업으로, 강의주제는 공산주의자 瞿秋白의 삶, 특히 죽음 직전에 남겼다는 <불필요한 말(多餘的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민 선생님께서 평소의 관심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구추백을 연구주제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수강하지 않는 여러 선배들까지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있고, 무엇보다 <多餘的話>의 흥미로운 내용은 저를 비롯한 수강생 모두를 강의 주제로 몰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領袖로 추앙받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 초반을 살아갔던 구추백. 하지만 그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사형되기 1달 전에 남긴 최후진술서 <多餘的話>는, 마치 그것이 국민당의 조작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남길 정도로 '충격적'인 자기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 매우 평범한 일개 文人으로서 중국 공산당의 영수로 10년 동안 명성을 누려온 것이야말로 "역사의 오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는 자조적인 어투와 함께.
자연 구추백의 <多餘的話>를 놓고 수업시간에도 다양한 해석이 오고갔지만, 정작 수업이 한참 지난 후 강의노트를 뒤척이며 잠시 깊은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필기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구추백의 폐결핵이라는 상황도 고려해야... 죽음 직전에 약한 모습 있기에... 아마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후회가 있었을 듯... 더구나 문학적 감성을 지닌 'tender-hearted'인 구추백이니..." 얼마나 정확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적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선생님은 구추백이 겪어왔던 폐결핵의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뇌를 주목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하셨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추백의 고통과 고뇌가 민 선생님의 병마와 그로 인해 겪으셨을 고통/고뇌와 연상되기 시작하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多餘的話>의 내용뿐 아니라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여망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저의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풀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多餘的話>를 펴 보니, "이런 피로감은 어떤 때에는 너무나 심해져 형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을 정도까지 되었소. 당시 나는 느꼈소. 우주가 사멸하든 말든 革命을 하든 反革命을 하든 간에 좀 쉬었으며, 쉬었으며, 쉬었으면!! 그렇소, 이제 '영원한 휴식'의 기회가 왔소"라는 구추백의 고백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이미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감지라도 하셨는지, 혹은 이러한 정황의 유사성으로 특별히 <多餘的話>를 마지막 연도의 강의교재로 선정하셨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선생님께서 <多餘的話>로 마지막 수업을 받은 제자에게 그 주제는 결코 예사롭지 않게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한때나마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아마 그때에도 선생님은 <多餘的話>의 초두에 인용된 『詩經』을 통해 무수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텐데...
"내 마음 아는 자, 근심 있구려! 하고, 내 마음 모르는 자, 무엇을 찾나? 하네.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荷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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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2002/02/18 12:16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by zizine
2002/2/18(월) 12:16
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그레이 (salinbum@orgio.net) http://gray.oo.co.kr/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가 2002년 3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거의 원조교제 수준으로 나아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애질 영화인데, 글의 시작부터 이 재미있는 제목의 영화를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영화의 OST에 참여한 루시드 폴(Lucid Fall) 때문이다. 루시드 폴과 《버스, 정류장》의 홍보비디오 감독 김병서 씨는 또 다른 연을 맺고 있기도 한데, 김병서 씨가 루시드 폴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던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기 때문이다.(쓰고 나니, 억지 연 같다. 세상에 억지가 아닌 게 어디 있겠어∼) 원래는 쌈넷에서 주최한 뮤직비디오 페스티발에 사용되었던 작품인데 그 곡을 위해 새롭게 편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그 뮤직비디오는 루시드 폴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폭발적인"에 대해서는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다. -_-)
어쨌든, 내가 이 예쁜 이름을 가진 밴드를 알게 된 건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음악 좀 듣는다고 상당히 꼴값하는 학생이었지만 사실, 아는 것이라고는 미국의 주류 밴드들과 영국의 꽃미남 밴드들이 전부였다.(물론, 지금도 많이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음악 좀 듣는다고 계속 설치다 보니, 보다 많은 밴드를 알고 싶었고, 다양한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수단은 잡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점에서 여러 잡지들을 저울질하던 중, 매달 공짜(!)로 sampler CD를 증정하는 잡지를 발견하였고 결국 그 잡지가 낙찰되었었다.
햇살이 말랑하게 비치던 4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고 CDP에서는 그 sampler CD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고 있던 와중 갑자기 귀에 꽂히는 음악이 있었다. 약간 지저분한 사운드였지만 상당히 서정적인 기타라인, 신선한 그러나 결코 튀지 않는 리듬파트,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있는 보컬이 묘하게 조화된 곡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CD의 부클렛(booklet)을 뒤졌고 그 밴드의 이름이 미선이이며 곡명은 〈송시〉라는 것을 알았다.
미선이, <송시>
"이제 소리 없이 시간의 바늘이 자꾸만 내 허리를 베어와요.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내 피부를 자르고 피 흐르고, 살을 자르고 그렇게 지나갈 꺼래요. 무서워요. 엄연한 자살행위. 그래서 웃어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전과자의 몸으론 힘들어요. 미안해요. 마음속에 울림은 내 입속의 신음은, 항상 그대에겐 짐이었을 뿐. 곳곳을 둘러봐도 성한 곳 하나 없고, 난 언제까지 썩어 갈 건지."
가사를 제대로 알고 나서 '이렇게 서정적이다 못해 신파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멜로디라인에 저런 이야기를 담아내다니∼' 하면서 제법 충격적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접해왔던 주류 음악들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자살하려는 전과자의 이야기를 노래한 곡은 미선이의 대표곡처럼 되었는데 나중에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노래를 만든 조윤석 씨(기타, 보컬)가 자살미수의 '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도 의연하게 노래한 것을 알고 나니 조윤석씨가 약간은 무서웠다. -_-
여하튼, 그들의 이름말고도 궁금해진 것이 많아 그들의 프로필까지 캐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학교 밴드(그 당시, 밴드명 : 곰돌이의 하루 -_-)로 시작했으며 컬리지 록페스티발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클럽씬에 합류하게 되었고 지금의 소속사인 Radio레이블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리고 sampler CD에 수록된 곡은 Raido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된 곡 중의 하나이며 정규앨범은 발매되지 않은 밴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그 해 가을 미선이의 첫 앨범 《Drifing》이 발매되었고, 〈치질〉같이 시니컬한 가사를 담은 곡은 여러 매체에서 언론비판을 우회적으로 돌린 곡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시간〉같이 서정적인 곡(눈물의 가요)은 심야방송에서 제법(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기준은... -_-) 리퀘스트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모 통신사에서는 올해의 앨범에 선정되기도 했다.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그렇게 조용조용 활동하던 미선이는 멤버들의 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김정현(드럼)씨가 군대에 갔고 조윤석씨도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게 된다. 그 와중 김정현씨보다는 활동이 자유로운 조윤석씨는 Radio의 사장 고기모씨와 프로젝트 밴드를 기획하게 되었고 일년 여의 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루시드 폴이다. 미선이의 프론트맨과도 같았던 조윤석 씨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만들어진 그 앨범은 밴드에 담고 있을 때 나온 앨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라인에서 느껴지는 신파의 기운이나 삶에 대한 가볍고도 진지한 고찰이 담겨있는 가사는 여전하지만, 조금 더 건조하고 더 개인적이다.
루시드 폴은 이 앨범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으며 심야라디오 방송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다거나, 이소라씨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고 《휴머니스트》같은 영화의 OST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작업으로는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버스정류장》의 OST. 영화 개봉에 앞서 대대적인 뮤직비디오 홍보와 OST에 영화의 스틸과 에세이집 따위를 엮어서 발매한다고 들었다. 조윤석씨가 음악 작업을 함에 있어 상당히 색다른 기회라고 생각되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설지도 모르는 지금. 몇몇의 밴드들이 겪고 있는 그런 문제를, (이를테면 델리 스파이스는 2집에서 사뭇 다른 패턴의 음악을 선보였으나 그다지 호응 받지 못했고, 크라잉넛 같은 밴드는 펑크의 정신을 기만한 채 상당히 주류에 편승하고 있다. -_-) 미선이, 혹은 루시드 폴이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속 음악에만 열중해 주었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한결같이 살짝 메마른 서정성을 선사해주는 그런 뮤지션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랄라∼
ps) 이 글을 쓰고 나서, 홍보용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는데... 한마디로, "우린 나아진 것을 바란 게 아냐! 그저 '예전만큼'을 원했다구. -_-" 모드였다. 너무 많이 기대를 해서일까. 슬프다. 루시드 폴도 그렇게, 지나가는 걸까. 징징.
사진 : 미선이 공식 사이트(http://www.misoni.co.kr)
(이 글은 문화웹진 지진(www.zizine.net)에 게재된 것입니다.)
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그레이 (salinbum@orgio.net) http://gray.oo.co.kr/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가 2002년 3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거의 원조교제 수준으로 나아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애질 영화인데, 글의 시작부터 이 재미있는 제목의 영화를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영화의 OST에 참여한 루시드 폴(Lucid Fall) 때문이다. 루시드 폴과 《버스, 정류장》의 홍보비디오 감독 김병서 씨는 또 다른 연을 맺고 있기도 한데, 김병서 씨가 루시드 폴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던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기 때문이다.(쓰고 나니, 억지 연 같다. 세상에 억지가 아닌 게 어디 있겠어∼) 원래는 쌈넷에서 주최한 뮤직비디오 페스티발에 사용되었던 작품인데 그 곡을 위해 새롭게 편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그 뮤직비디오는 루시드 폴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폭발적인"에 대해서는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다. -_-)
어쨌든, 내가 이 예쁜 이름을 가진 밴드를 알게 된 건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음악 좀 듣는다고 상당히 꼴값하는 학생이었지만 사실, 아는 것이라고는 미국의 주류 밴드들과 영국의 꽃미남 밴드들이 전부였다.(물론, 지금도 많이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음악 좀 듣는다고 계속 설치다 보니, 보다 많은 밴드를 알고 싶었고, 다양한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수단은 잡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점에서 여러 잡지들을 저울질하던 중, 매달 공짜(!)로 sampler CD를 증정하는 잡지를 발견하였고 결국 그 잡지가 낙찰되었었다.
햇살이 말랑하게 비치던 4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고 CDP에서는 그 sampler CD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고 있던 와중 갑자기 귀에 꽂히는 음악이 있었다. 약간 지저분한 사운드였지만 상당히 서정적인 기타라인, 신선한 그러나 결코 튀지 않는 리듬파트,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있는 보컬이 묘하게 조화된 곡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CD의 부클렛(booklet)을 뒤졌고 그 밴드의 이름이 미선이이며 곡명은 〈송시〉라는 것을 알았다.
미선이, <송시>
"이제 소리 없이 시간의 바늘이 자꾸만 내 허리를 베어와요.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내 피부를 자르고 피 흐르고, 살을 자르고 그렇게 지나갈 꺼래요. 무서워요. 엄연한 자살행위. 그래서 웃어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전과자의 몸으론 힘들어요. 미안해요. 마음속에 울림은 내 입속의 신음은, 항상 그대에겐 짐이었을 뿐. 곳곳을 둘러봐도 성한 곳 하나 없고, 난 언제까지 썩어 갈 건지."
가사를 제대로 알고 나서 '이렇게 서정적이다 못해 신파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멜로디라인에 저런 이야기를 담아내다니∼' 하면서 제법 충격적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접해왔던 주류 음악들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자살하려는 전과자의 이야기를 노래한 곡은 미선이의 대표곡처럼 되었는데 나중에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노래를 만든 조윤석 씨(기타, 보컬)가 자살미수의 '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도 의연하게 노래한 것을 알고 나니 조윤석씨가 약간은 무서웠다. -_-
여하튼, 그들의 이름말고도 궁금해진 것이 많아 그들의 프로필까지 캐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학교 밴드(그 당시, 밴드명 : 곰돌이의 하루 -_-)로 시작했으며 컬리지 록페스티발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클럽씬에 합류하게 되었고 지금의 소속사인 Radio레이블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리고 sampler CD에 수록된 곡은 Raido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된 곡 중의 하나이며 정규앨범은 발매되지 않은 밴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그 해 가을 미선이의 첫 앨범 《Drifing》이 발매되었고, 〈치질〉같이 시니컬한 가사를 담은 곡은 여러 매체에서 언론비판을 우회적으로 돌린 곡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시간〉같이 서정적인 곡(눈물의 가요)은 심야방송에서 제법(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기준은... -_-) 리퀘스트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모 통신사에서는 올해의 앨범에 선정되기도 했다.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그렇게 조용조용 활동하던 미선이는 멤버들의 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김정현(드럼)씨가 군대에 갔고 조윤석씨도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게 된다. 그 와중 김정현씨보다는 활동이 자유로운 조윤석씨는 Radio의 사장 고기모씨와 프로젝트 밴드를 기획하게 되었고 일년 여의 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루시드 폴이다. 미선이의 프론트맨과도 같았던 조윤석 씨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만들어진 그 앨범은 밴드에 담고 있을 때 나온 앨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라인에서 느껴지는 신파의 기운이나 삶에 대한 가볍고도 진지한 고찰이 담겨있는 가사는 여전하지만, 조금 더 건조하고 더 개인적이다.
루시드 폴은 이 앨범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으며 심야라디오 방송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다거나, 이소라씨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고 《휴머니스트》같은 영화의 OST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작업으로는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버스정류장》의 OST. 영화 개봉에 앞서 대대적인 뮤직비디오 홍보와 OST에 영화의 스틸과 에세이집 따위를 엮어서 발매한다고 들었다. 조윤석씨가 음악 작업을 함에 있어 상당히 색다른 기회라고 생각되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설지도 모르는 지금. 몇몇의 밴드들이 겪고 있는 그런 문제를, (이를테면 델리 스파이스는 2집에서 사뭇 다른 패턴의 음악을 선보였으나 그다지 호응 받지 못했고, 크라잉넛 같은 밴드는 펑크의 정신을 기만한 채 상당히 주류에 편승하고 있다. -_-) 미선이, 혹은 루시드 폴이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속 음악에만 열중해 주었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한결같이 살짝 메마른 서정성을 선사해주는 그런 뮤지션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랄라∼
ps) 이 글을 쓰고 나서, 홍보용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는데... 한마디로, "우린 나아진 것을 바란 게 아냐! 그저 '예전만큼'을 원했다구. -_-" 모드였다. 너무 많이 기대를 해서일까. 슬프다. 루시드 폴도 그렇게, 지나가는 걸까. 징징.
사진 : 미선이 공식 사이트(http://www.misoni.co.kr)
(이 글은 문화웹진 지진(www.zizine.net)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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