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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by zizine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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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by zizine

mercredi 2002. 2. 18. 12:16
2002/2/18(월) 12:16
루시드 폴 :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을 노래하다

그레이 (salinbum@orgio.net) http://gray.oo.co.kr/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가 2002년 3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거의 원조교제 수준으로 나아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애질 영화인데, 글의 시작부터 이 재미있는 제목의 영화를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영화의 OST에 참여한 루시드 폴(Lucid Fall) 때문이다. 루시드 폴과 《버스, 정류장》의 홍보비디오 감독 김병서 씨는 또 다른 연을 맺고 있기도 한데, 김병서 씨가 루시드 폴의 첫 앨범에 수록되었던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기 때문이다.(쓰고 나니, 억지 연 같다. 세상에 억지가 아닌 게 어디 있겠어∼) 원래는 쌈넷에서 주최한 뮤직비디오 페스티발에 사용되었던 작품인데 그 곡을 위해 새롭게 편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그 뮤직비디오는 루시드 폴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폭발적인"에 대해서는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다. -_-)

어쨌든, 내가 이 예쁜 이름을 가진 밴드를 알게 된 건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음악 좀 듣는다고 상당히 꼴값하는 학생이었지만 사실, 아는 것이라고는 미국의 주류 밴드들과 영국의 꽃미남 밴드들이 전부였다.(물론, 지금도 많이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음악 좀 듣는다고 계속 설치다 보니, 보다 많은 밴드를 알고 싶었고, 다양한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수단은 잡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점에서 여러 잡지들을 저울질하던 중, 매달 공짜(!)로 sampler CD를 증정하는 잡지를 발견하였고 결국 그 잡지가 낙찰되었었다.

햇살이 말랑하게 비치던 4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고 CDP에서는 그 sampler CD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고 있던 와중 갑자기 귀에 꽂히는 음악이 있었다. 약간 지저분한 사운드였지만 상당히 서정적인 기타라인, 신선한 그러나 결코 튀지 않는 리듬파트,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있는 보컬이 묘하게 조화된 곡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CD의 부클렛(booklet)을 뒤졌고 그 밴드의 이름이 미선이이며 곡명은 〈송시〉라는 것을 알았다.

미선이, <송시>
"이제 소리 없이 시간의 바늘이 자꾸만 내 허리를 베어와요.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내 피부를 자르고 피 흐르고, 살을 자르고 그렇게 지나갈 꺼래요. 무서워요. 엄연한 자살행위. 그래서 웃어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전과자의 몸으론 힘들어요. 미안해요. 마음속에 울림은 내 입속의 신음은, 항상 그대에겐 짐이었을 뿐. 곳곳을 둘러봐도 성한 곳 하나 없고, 난 언제까지 썩어 갈 건지."


가사를 제대로 알고 나서 '이렇게 서정적이다 못해 신파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멜로디라인에 저런 이야기를 담아내다니∼' 하면서 제법 충격적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접해왔던 주류 음악들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자살하려는 전과자의 이야기를 노래한 곡은 미선이의 대표곡처럼 되었는데 나중에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노래를 만든 조윤석 씨(기타, 보컬)가 자살미수의 '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도 의연하게 노래한 것을 알고 나니 조윤석씨가 약간은 무서웠다. -_-

여하튼, 그들의 이름말고도 궁금해진 것이 많아 그들의 프로필까지 캐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학교 밴드(그 당시, 밴드명 : 곰돌이의 하루 -_-)로 시작했으며 컬리지 록페스티발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클럽씬에 합류하게 되었고 지금의 소속사인 Radio레이블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리고 sampler CD에 수록된 곡은 Raido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된 곡 중의 하나이며 정규앨범은 발매되지 않은 밴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그 해 가을 미선이의 첫 앨범 《Drifing》이 발매되었고, 〈치질〉같이 시니컬한 가사를 담은 곡은 여러 매체에서 언론비판을 우회적으로 돌린 곡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시간〉같이 서정적인 곡(눈물의 가요)은 심야방송에서 제법(지극히 주관적이다. 이 기준은... -_-) 리퀘스트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모 통신사에서는 올해의 앨범에 선정되기도 했다.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그렇게 조용조용 활동하던 미선이는 멤버들의 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김정현(드럼)씨가 군대에 갔고 조윤석씨도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게 된다. 그 와중 김정현씨보다는 활동이 자유로운 조윤석씨는 Radio의 사장 고기모씨와 프로젝트 밴드를 기획하게 되었고 일년 여의 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루시드 폴이다. 미선이의 프론트맨과도 같았던 조윤석 씨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만들어진 그 앨범은 밴드에 담고 있을 때 나온 앨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라인에서 느껴지는 신파의 기운이나 삶에 대한 가볍고도 진지한 고찰이 담겨있는 가사는 여전하지만, 조금 더 건조하고 더 개인적이다.

루시드 폴은 이 앨범으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으며 심야라디오 방송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다거나, 이소라씨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고 《휴머니스트》같은 영화의 OST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작업으로는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버스정류장》의 OST. 영화 개봉에 앞서 대대적인 뮤직비디오 홍보와 OST에 영화의 스틸과 에세이집 따위를 엮어서 발매한다고 들었다. 조윤석씨가 음악 작업을 함에 있어 상당히 색다른 기회라고 생각되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설지도 모르는 지금. 몇몇의 밴드들이 겪고 있는 그런 문제를, (이를테면 델리 스파이스는 2집에서 사뭇 다른 패턴의 음악을 선보였으나 그다지 호응 받지 못했고, 크라잉넛 같은 밴드는 펑크의 정신을 기만한 채 상당히 주류에 편승하고 있다. -_-) 미선이, 혹은 루시드 폴이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속 음악에만 열중해 주었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한결같이 살짝 메마른 서정성을 선사해주는 그런 뮤지션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모자란 팬의 입장인 것이다. 랄라∼

ps) 이 글을 쓰고 나서, 홍보용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는데... 한마디로, "우린 나아진 것을 바란 게 아냐! 그저 '예전만큼'을 원했다구. -_-" 모드였다. 너무 많이 기대를 해서일까. 슬프다. 루시드 폴도 그렇게, 지나가는 걸까. 징징.

사진 : 미선이 공식 사이트(http://www.misoni.co.kr)

(이 글은 문화웹진 지진(www.zizine.net)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