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s child, Mercredi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 오규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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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 오규원

mercredi 2005. 2. 4. 17:58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
몇 가락을 뽑았고,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

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정오에 출근했고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
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
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
그 옆에 선 아이들 조차
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
버스가 탈선되기를 탈선의 장치의
거리가 준비되기를,
허락받은 사람들은 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해
세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 , 그리고
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
냄새가 나지않는 사랑이란
맹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
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
세방을 얻어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나에게 질문하며,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술과 함께 오기도 좀, 개뿔도 좀, 흰소리도 좀,십원짜리도 좀 마셨고
그러나 오늘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
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
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
이웃집 지붕위로
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일어나 있었고,
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
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
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
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
한번듣고 ,뒤집어서
반야경을 한 번 듣고.

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 처럼 출근했고
출근 하자마자 커피를 한잔 마셨고
전화 두통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
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서정시가 이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 하며
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 하며,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
살것이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
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
주소도 알려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
계속 편지를 쓸것이다.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것이고
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
궁리할 것이고
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것이고
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것을
사랑하며 만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
전화가 불통이면
편지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