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s child, Mercr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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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

mercredi 2005. 3. 9. 19:56
허영심을 잃으면 본능적인 기쁨도 사라진다. 허영심은 자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거울을 쳐다보는 젊은 여인의 눈길. "나는 너무 예뻐.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볼 거야." 이런 생각은 행복을 준다. 혹은 자신을 칭찬하는 신문기사를 읽고 있는 배우의 눈길. "나는 사랑과 숭배를 받고 있어. X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청중을 바라보는 강연자의 눈길. "모두들 나를 모시려고 야단들이야." 혹은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 "아무리 봐도 나는 정말 잘생겼어. 여자들이 홀딱 넘어갈 거야." 혹은 운동선수. "Y보다는 내가 월등 우수한 선수지." 혹은……. 혹은…….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며 허영심을 느끼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자신에게 홀딱 반하는 데, 더 정확히 말해, 자기 자신의 시공간적 현상을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의 계명.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외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은 꾸준한 자아, 불변의 인격이다. 스쳐지나가는 현상이나 자기 도취가 아니다. 사랑은 더 큰 것을 향한 헌신이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월이 가면 사라질 자신의 장점에 홀딱 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수천 수만의 존재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삼라만상이 그러하듯!) 신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어리석은 허영심을 제거해준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나이가 들어가면서) 허영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갑자기 멸시당한 느낌을 받으면 어떤가? 어리석은 내가 불끈 일어선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어쨌든……. 내 자신의 체험. 작가라는 허영심이(원래 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사라지면서 서서히 내 삶은 빈약해지고 퇴색 되어갔다. 거울보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나의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저기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칭찬과 사랑, 비난과 험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차츰차츰 내게서 미사여구가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자조와 냉담. 삶의 풍경은 자꾸만 삭막해지고 굳어졌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말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인간이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위험은 있다. 허영심을 버렸다는 허영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이다. 무아(無我)의 황무지에서 살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허영심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을 불러올 교만이다.

신이시여, 저에게 잠시동안 약간의 허영심과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하소서! 벌거벗은 저를 깨달음의 황무지에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출처 : http://imige.com.ne.kr/destiny/1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