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s child, Mercr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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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글들

多餘的話

mercredi 2003. 9. 7. 19:25
동사과/용화반의 잡기장 이름은 다여적화이지요. 새내기적엔 그냥 동양사학과이니 한문으로 알아서 지었으려니 했고, 2학년이 되면서 구추백과, 그의 저서, 그리고 다여적화라는 말의 뜻(불필요한말, 잡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다여적화, 혹은 줄여서 다여라는 말이 점점 저에게 각별해지고 또 그 말에 뭔지모를 정이 드는 것 같았지요.

오늘 인문대 홈페이 검색을 하다 우연히 찾은 이 글에서 다여적화가 동양사학과에게, 혹은 용화반에게도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하나 더 찾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글은 민두기선생님께서 소천하셨을 때 지금은 미국에 계신 93학번 영헌오빠께서 쓰신 글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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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의 뒤늦은 깨달음

曺永憲 (박사과정, 93학번)

"이제 오르던 산을 내려갈 때가 됐습니다. 저는 1997년 12월 8일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40여 년의 학구생활에서 벗어나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65세 정년제의 덕입니다."

정년퇴임을 앞두신 민 선생님께서 知人들에게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제히 보내셨던 마지막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당시 과 T.A.로서 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이 편지를 복사하던 저는 "평소 바라던대로 한가롭게 自適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문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마 민 선생님이 평소에 정말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바라셨단 말인가? 한 치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으며 타인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하셨다던 그 선생님이? 당시의 저로서는 솔직히 세상의 그 어떤 반어적인 겸양의 표현도 이보다는 더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민 선생님은 소천하셨고, 또 벌써 그로부터 10여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은 그때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그 '한가로운 자적의 삶'이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문득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마지막 수업의 강의노트를 뒤척인 이후부터 말미암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받은 마지막 수업은 1997년 1학기 대학원 수업으로, 강의주제는 공산주의자 瞿秋白의 삶, 특히 죽음 직전에 남겼다는 <불필요한 말(多餘的話)>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민 선생님께서 평소의 관심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구추백을 연구주제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수강하지 않는 여러 선배들까지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있고, 무엇보다 <多餘的話>의 흥미로운 내용은 저를 비롯한 수강생 모두를 강의 주제로 몰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領袖로 추앙받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 초반을 살아갔던 구추백. 하지만 그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사형되기 1달 전에 남긴 최후진술서 <多餘的話>는, 마치 그것이 국민당의 조작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남길 정도로 '충격적'인 자기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 매우 평범한 일개 文人으로서 중국 공산당의 영수로 10년 동안 명성을 누려온 것이야말로 "역사의 오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는 자조적인 어투와 함께.

자연 구추백의 <多餘的話>를 놓고 수업시간에도 다양한 해석이 오고갔지만, 정작 수업이 한참 지난 후 강의노트를 뒤척이며 잠시 깊은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필기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구추백의 폐결핵이라는 상황도 고려해야... 죽음 직전에 약한 모습 있기에... 아마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후회가 있었을 듯... 더구나 문학적 감성을 지닌 'tender-hearted'인 구추백이니..." 얼마나 정확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적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선생님은 구추백이 겪어왔던 폐결핵의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뇌를 주목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하셨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추백의 고통과 고뇌가 민 선생님의 병마와 그로 인해 겪으셨을 고통/고뇌와 연상되기 시작하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多餘的話>의 내용뿐 아니라 한가로운 자적의 삶을 여망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저의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풀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多餘的話>를 펴 보니, "이런 피로감은 어떤 때에는 너무나 심해져 형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을 정도까지 되었소. 당시 나는 느꼈소. 우주가 사멸하든 말든 革命을 하든 反革命을 하든 간에 좀 쉬었으며, 쉬었으며, 쉬었으면!! 그렇소, 이제 '영원한 휴식'의 기회가 왔소"라는 구추백의 고백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이미 성큼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감지라도 하셨는지, 혹은 이러한 정황의 유사성으로 특별히 <多餘的話>를 마지막 연도의 강의교재로 선정하셨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선생님께서 <多餘的話>로 마지막 수업을 받은 제자에게 그 주제는 결코 예사롭지 않게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한때나마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아마 그때에도 선생님은 <多餘的話>의 초두에 인용된 『詩經』을 통해 무수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텐데...

"내 마음 아는 자, 근심 있구려! 하고, 내 마음 모르는 자, 무엇을 찾나? 하네.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荷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