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s child, Mercredi

復古? 본문

=多餘的話= 2001~2007/=多餘的話= 第一期

復古?

mercredi 2003. 7. 22. 02:14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을 뒤지다 '이은혜'라는 이름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원수연과 더불어 90년대 순정만화의 대명사격인 작가이다.

사실 나는 좋아하는 취향은 분명해도 그것에 마니아처럼 파고드는 편은 아니다. 끈기가 부족해서 그런가^^; 고로 이은혜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또한 나의 만화 취향도 시작할 때의 토종 한국 순정을 벗어나 이제는 도저히 뭐라 설명 할 수 없는 잡탕 입맛이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원수연이나 이은혜를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아- 지금 비 온다, 젠장--;)

내가 이은혜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참 사춘기일 나이에 교실에 굴러다니던 점프트리A+를 우연히 봐버리게 되었다. 어머니의 만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때문에 그전까지 내가 보았던 만화는 고작 계몽사 학습만화(오랜만에 듣는 말이지요^^?)와 신문의 4컷만화 정도였는데 자유롭고 낭만적인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페이지마다 소녀감수성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그 만화를 보고 안 반해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은혜의 만화는, 캔디 류의 정통 순정과는 달리 매우 절제되고 쿨 하게, 그러면서도 시적인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캔디류의 정통 순정이라는 말에 "알지도 못하는 것이!" 라며 돌을 던질 태세를 하실 분이 분명 계실 것을 안다. 말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레이스 나풀거리고 고수머리와(ex:이라이자 머리^^;)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나오는 그냥 딱 봐도 현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환상인 그런 순정이 아니라,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이고 그림체도 그다지 과장되지 않고 정갈한 느낌을 주면서 적당히 유행에 뒤쳐지지 않아 세련되었고, 내용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다루되 중간중간 보일락말락 허구적 요소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결코 오바 하지 않음이요, 간간히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독백과 대사는 매우 시적이니(cf:015B 등의 90년대에 날리던 가수들의 노래 가사를 보시오. 지금과는 확실히 다르오.) 바로 이것이 이은혜 만화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다른 만화가들도 어느정도는 그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은혜만의 그 무엇은 분명히 있다. (큰일이군, 계절 종강하면 만화방 가서 이은혜 만화 다 보고 와서 서평 써야겠다--;)

만화 이야기 하다 중간에 잠시... 고백하건데, 당시 나의 모습은 지금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또 정말 달랐다. 뭐랄까... 건방졌다고 해야 하나. young and proud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성장이 빨랐던 나는 초등학교시절 내내 반에서 키가 가장 컸고 몸도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했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 어머니의 책세례를 흠뻑 받아또래 아이들보다 독서량이 월등했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숙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지금이랑은 영 딴판이지, 쿨럭- 저 월등이라는 말이 심히 민망하군^^; 누가 믿을까^^;?) 사람이란게, 칭찬을 적당히 들으면 밝고 진취적이 되지만 언제나 과유불급. 어디서나 여러모로 튀었기에, 그리고 그 튐이란 제도권 교육 안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성격의 것들이었기에(다독하는 습관, 반듯한 입성, 뛰어난 성적, 모범적인--; 행동거지, etc.) 나는 칭찬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고 결과적으로 매우 건방져 졌다. 항상 또래 친구들이 나보다 한참 뒤떨어져 보였고 이야기가 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빨리 커서 중학생이 되고, 그 뒤엔 어서 고등학생이 되고, 그 후에는 대학생이 되는 꿈을 꿨다. 물론 취직, 결혼, 그 이후 쭈욱 다 생각했지. 요는 난 항상 내가 어서 자라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 나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 혹은 나보다 좀 더 잘난 사람들을 만나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절친했던 친구가 언제나 한 명 이상 있기는 했지만... '학급'이라는 집단에 무난히 섞이기는 정말 싫었다.

그랬는데... 초등학생이라는 신분이, 그리고 언제나 욕을 하고 불량식품과 문방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전자오락만 알고 지내는 주변의 친구들이(특히 남자아이들. 사실 그때까진 남자애들이 여자애들보다 좀 어리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 쳇, 써놓고 보니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로군-.-; 차분하면서 서늘한, 그럼과 동시에 어딘지 낭만이 엿보이는 느낌을 주는 수채화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의 만화책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별로 대단한 내용도 아닌 만화를 1권부터 4권까지 정말 열심히 읽었다. 고등학생들의 연애이야기, 가슴아픈 삼각관계... 생전 처음 만화책이라는 것을 돈주고 빌려서 엄마한테 들킬까 몰래몰래 보았더랬다. 다 보고나서 또 보도, 보고 또 보고, 보고 감동 받고, 주인공들의 멋진 독백과 대사들을 읇조리고, 일기장에 배끼고, 그것도 모자라 몇몇은 외우고, 친구한테 쓰는 편지에 옮겨적고...(90년대 순정만화는 시적인 말빨로 승부했다. 그게 80년대의 시화집이나 일기장 문화를 이어받은 것인지도...여튼 로망이야, 로망! ^^;) 이쁘거나 멋지다고 생각되는 장면은 연습장에 열심히 지우고 또 지우고 고치고 또 고치며 따라 그리고... 그러면서 정말로 고등학생이 되면 이렇게 사는 것일까? 하는 되도 않는 상상을 하고^^; 사실 JTA+에 나오는 육영고등학교같은 고등학교에 남한에 있기나 할까? ^^;

그랬던 만화, 점프트리에이플러스. 그리고 작가 이은혜(사실 으네리라는 애칭이 더 좋지만^^) 우연히 만나게 되니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일러스트들을 보기만 해도 꺅꺅 소리가 절로 나고 다시금 열 다섯살이 된 기분이랄까^^; 90년대, 그리고 나의 십대...

그렇지만 지금은 2003년이고 되돌아보면 더이상 90년대 중반의 그 시적인 감수성은 먹히질 않으며 이은혜, 원수연, 015B, 넥스트, 이오공감 그리고 이승환의 초기 앨범들, 장필순, 조금 다르지만 손지창과 김민종을 기억하는 이들은 벌써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 으네리는 요새 뭘 하는지 94년에 시작한 블루는 아직도 완결이 나지 않았고 2000년에 야심차게 시작한 파인키스도 4권 이후로 소식이 없다. 다시말해 욕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사족인데, 파인키스... 솔직히 실망했다. 그때의 감수성을 다시 섬세히 살려줄 것을 기대하고 보았는데 영... 으네리답지 않은 오바의 연속... 역시 그녀는 블루에서 모든 정열을 다 불태웠단 말인가.

제목을 復古?라고 달았던 이유는 왠지 모르게 자꾸만 지난 세기의 음악과 만화를 찾는 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서였다. 두번의 학고와 정리해고 당하신 아버지, 그리고 항상 적자인 가게, 불황, 취업난, 허약한 어머니, 언제나 어려운 인간관계 속에서 언제나 불만인 스물두 살의 아가씨는 아무 걱정 없이 미래를 굳게 믿고 자신은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멋있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어린 아가씨가 좋아하고 즐거워했던 것들을 슬쩍 훔쳐보며 마치 그것이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인양 씩 웃는다. 그리고는 지금 그녀가 지니고 있는 온갖 문명의 이기들을 동원해 어린 아가씨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손에 쥐고는 즐거워한다...

분명, 과거의 즐거웠던 그 시간들은 그대로 존재한다, - 가끔 기억이라는 것이 삑사리를 내기는 하지만 - 책상 서랍 깊은 곳 보물 상자 속에... 바쁜 삶을 살아가다 잠시 여유가 생기면, 혹은 필요한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그 상자를 발견하게 되고 이게 뭐지 하고 무심결에 열었다가 옛 생각에 미소를 짓게 되고... 그래, 여기까지. 그 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거기에서 끝이다. 아가였을 때 입던 옷을 보면 아련해지지만 지금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예전의 것들을 지나치게 그리워하고 선호하는 것, 그게 바로 늙는 것 아닐까. 내가 그렇게도 속으로, 때로는 뒤에서 늙은이들이라고 욕했던 사람들이 했던 것들과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답은 자명하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그만큼의 애정어린 감정들을 쏟아낼 수만 있다면 아마도 내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겠지. 그런데 문제는 알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 안주하고 싶은 것. 아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렴...